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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시사

이스라엘 이야기 5 - 유대인의 역사

by jinsabu 2024.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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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민족(히브리어: בני ישראל)은 히브리어를 말하는 고대 근동의 사람들로, 히브리인이라고도 하며 고대 히브리어를 사용했던 아시아아프리카족 셈어를 사용하는 셈족에 속하며 군주 시대 동안(기원전 11세기~7세기) 이스라엘땅에 거주하였다. 그들은 고대 유대인의 조상이며 현대 유대인 정체성의 조상이다.

출처: https://jinsabu.tistory.com/entry/이스라엘-민족과-히브리인-그들은-누구인가 [jinsabu 님의 블로그:티스토리]

 

유대인 (유태인)의 어원 

히브리인, 이스라엘민족인 "유대인" 그들은 누구인가?

다윗의 별 - 유대교의 상징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유대인은 중동의 히브리인에서 기원한 이스라엘 12지파 중 유다 지파, 또는 기원전 10세기부터 기원전 6세기까지 존속했던 국가인 유다 왕국의 후손으로 간주되며, 근연민족으로는 이스라엘 왕국의 후손인 사마리아인이 있다.

 

이스라엘인은 이스라엘, 즉 야곱을 시조로 하는 민족을 뜻한다야곱(히브리어: יַעֲקֹב 야아콥, 영어: Jacob 제이콥)]은 구역의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이다. 아브라함의 손자이며, 이삭과 리브가의 둘째 아들이다. 형을 만나기 전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다가 천사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그의 아들인 12명의 후손들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를 정확히는 알수 없으나 기원전 19세기경이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10세기경 이스라엘 왕국이 설립되고 나중에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왕국으로 분열 된 이후에도 남 유다왕국의 백성들은 스스로를 '이스라엘 자손'으로 여겼다. "유대인"이라는 말은 남 유다왕국이 무너진 뒤, 그 유민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이후 아니면 페르시아 시대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 기원전 550 - 기원전 330)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스라엘 왕국 분열 이전의 고대 히브리인 혹은 고대 이스라엘인(בְּנֵי יִשְׂרָאֵל, Israelites) '유대인'이라 통칭하는 것은 틀린 표현이다

 

유대인의 역사적 기원

유대인의 역사는 그들의 조상인 고대 이스라엘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이스라엘의 구성 민족인 히브리인은 메소포타미아 및 레반트 남부에 살았으나 나중에 가나안 일대로 이주했고, 이집트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집트에서 살기도 하였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출애굽기는 유대인의 민족적 기원을 다룬다.

 

구약의 창세기에서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은 우리나라의 단군왕검에 해당하며, 이집트 노예에서 탈출을 주도한 모세는 히브리인들에게 최초로 집단적 주권의식을 주입시키고 자립의 길을 처음으로 이끈 인물이다. 이들은 모세의 지휘 하에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자신들이 정착할 만한 지역을 탐색하는 것과 동시에 이동 경로에 있는 토착 세력들과 전쟁을 펼치며 약 사십 년 정도 광야에서 떠돌게 된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히브리인들은 모세가 죽은 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지휘하여 가나안 일대를 정복하여 이 지역으로 이주 하였다. 가나안 지역은 고대부터 다민족이 거주하든 곳으로 성경에 따르면 히브리인들은 블레셋인, 암몬인, 모압인 등 여러 민족 (부족)들과 섞여 살고 있었다.  

 

이후 기원전 10세기에 이스라엘 왕국이 세우졌고 나중이 이 이스라엘왕국은 북 이스라엘 왕국과 남 유다 왕국으로 분열된디. 남 유다왕국은 야곱의 자손인 이스라엘 12개 지파 중 2개의 지파인 "유다 지파" "베냐민 지파"의 지지로 세워진 왕국이다. 이 유다왕국은 이스라엘 왕국의 창건 왕조인 다윗 왕조가 군림하였다. 히브리인 - 이스라엘 민족이 세운 이 유다왕국은 유대인 정체성의 기초가 된다.

 

현대 유대인은 히브리인 - 이스라엘민족 - 유다왕국에서 기원한 민족적, 종교적, 문화적 집단을 통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이스라엘 왕국 (기원전 922년경~기원전 722년경)

유대인은 고대 히브리인 - 이스라엘민족이 세운 고대 이스라엘왕국 - 유다왕국에서 기원한다.

 

이스라엘 왕국(아람어: 𐤉𐤔𐤓𐤀𐤋, 히브리어: ממלכת ישראל המאוחדת) 또는 헤브라이 왕국은 고대 이스라엘에 존재하던 히브리인들의 왕국으로,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의 국가이다. 나중에 북이스라엘 왕국과 남유다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북이스라엘 왕국과 구분하기 위해 이 시대를 통일왕국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이스라엘 왕국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실존에 대해 역사학계 내에서 논쟁이 이어지고 있으나 통일 왕국의 존재를 지지하는 이들은 대체로 통일 이스라엘왕국은 기원전 1047년경에서 기원전 930년경 사이에 존재했던 것으로 본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기원전 11세기 후반에 사울(히브리어: שָׁאוּל 샤울)은 가나안지역에 흩어져 살던 부족 사회를 조직적인 국가의 형태로 전환하였고 이스라엘 왕국의 초대 멜렉(군주)가 된다이스라엘의 2대 다윗 왕(기원전 1047 ~ 기원전 920년) 과 3대 솔로몬 왕 (기원전 990 ~ 기원전 931년)의 시대에는 이스라엘 왕국(기원전 1047년경 - 기원전 930년경)의 전성기를 이룬다.

 

솔로몬 사후 히브리 지역은 북 이스라엘 왕국과 남 유다 왕국으로 분열하여 히브리인은 이스라엘 왕국의 사마리아인과 "유다 왕국의 유대인"으로 나뉘어졌다. 

 

사마리아인 : 사마리아인은 북 이스라엘 왕국의 후손들이다. 이스라엘 왕국이 아시리아에 멸망당한 이후 남 유다 왕국의 정체성을 계승한 유대인과 차별화되었다. 사마리아인은 베냐민 지파 후손들을 포함했지만, 이 가계는 1960년대에 단절되었다. 현재 사마리아인의 수는 약 800 남짓뿐이며, 대부분이 요르단강 서안 지구의 나블루스 근처에 있는 게리짐산의 키럇 루자(Kiryat Luza)와 이스라엘의 홀론)에 살고 있다사마리아인들은 현대 히브리어나 아랍어의 팔레스타인 방언을 일상어로 쓰지만, 종교 언어로는 고대 사마리아 히브리어와 사마리아 아람어를 보존하고 있다. 이들 사마리아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사마리아 문자를 사용하는데, 이는 초기 히브리 문자로부터 이어져 온 문자이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왕국

 

유다왕국 (기원전 931년 ~ 기원전 586년) 

유대인은 고대 히브리인이 세운 고대 이스라엘왕국 - 유다왕국에서 기원한다.

 

유다 왕국(아람어: 𐤁𐤉𐤕𐤃𐤅𐤃)은 이스라엘 왕국이 기원전 931년 무렵에 분열되어 12개 지파 가운데 2개의 지파인 "유다 지파" "베냐민 지파"의 지지로 세워진 왕국으로, 이스라엘 왕국의 창건 왕조인 다윗 왕조가 군림하였다. 북 이스라엘 왕국과 대조하여 남 유다 왕국으로 부르기도 한다.

 

솔로몬 사후 12지파 중 유다 지파와 벤야민 지파를 제외하고 나머지 10지파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10지파는 여로보암을 지지하여 그를 이스라엘 왕국의 국왕으로 받들었고, 르호보암의 통치 아래에 있었던 유다 지파와 벤야민 지파를 중심으로 유다 왕국이 건국되었다.

 

왕국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유다 지파의 이름을 따서 유다왕국이라 불렀고, 344년 동안 20명의 왕이 재위하였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히스기야, 여호사밧, 아사, 요시야, 요담 등 몇몇 외에는 유대교 신앙 외에 다른 신앙에 호의적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유다 왕국의 중심지는 왕국의 수도인 예루살렘이었다. 유다 왕국은 기원전 586년 무렵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당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 유다는 북 이스라엘에 비해 상대적으로 영토가 좁고 척박했지만 동질적인 주민들이 어울려 살았다. 남북 분열 이후에도 남 유다 왕국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큰 변화를 겪지 않았다. 지리적으로도 외부 세력과 어느 정도 격리되어 있어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북왕조와의 경쟁 관계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화 현상은 날로 심화되어 갔다. 르호보암으로부터 마지막 왕 시드기야에 이르기까지 총 19명의 왕은 모두 다윗의 후손으로서 다윗 왕가를 계승해 나갔다. 이들에 대한 히브리 성서의 기록은 대부분 종교적 관점에만 치중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 경제적 상황 등을 자세히 알 수는 없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 이후 유다는 당분간 아시리아의 위성국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히브리인 왕국의 멸망 이후

북 이스라엘왕국은 기원전 722년에 아시리아(기원전 2450년 - 기원전 609년)에 남 유다왕국은 기원전 597년에 신 바빌로니아 (기원전 626 ~ 기원전 539년) 에 패망하였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유대인들은 아람어를 일상언어로 사용하기 시작하고 히브리어는 종교 의례에나 쓰였고 신 바빌로니아에 유다 왕국이 멸망한 이후 유대인들은 "바빌론 유수"를 겪게 된다.  

 

북이스라엘 왕국이 먼저 신아시리아 제국에게 멸망한 이후 유다 왕국은 이집트를 동맹으로 삼아 아시리아를 견제한 히스기야, 아시리아의 전성기에 친아시리아 정책을 편 므낫세 및 아시리아가 쇠퇴하자 유다의 중흥과 야훼 신앙 진흥을 꾀했던 요시야 같은 중흥 군주도 있었지만, 요시야가 이집트 왕 네코 2세에게 살해되자 이집트의 괴뢰국으로 종속되었고, 마지막 시드기야 때에는 신바빌로니아의 침략에서 이집트가 유다 왕국의 원군 요청을 무시해 솔로몬 성전이 무너지는 등 수도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멸망했고 주민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러한 바빌론 유수 과정에서 유다 왕국의 후손인 유대인들은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언어인 아람어를 익히게 되었다.

 

아람어(ארמית / ܐܪܡܝܐ 아라마야 / 아라미트) : 한때 시리아, 메소포타미아에서 기원전 500년경부터 기원후 600년 무렵까지 고대 오리엔트 지역의 국제어로 사용되었으며, 아프로아시아어족의 셈어파의 북서셈어군에 속하는 언어이다. 고대에는 아람 문자로 표기했으나, 현재는 아람 문자에서 파생된 시리아 문자를 쓴다.

 

바빌론 유수 : 기원전 597년 유다 왕국이 멸망하면서 치드키야 왕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수도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을 말한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538년에 신바빌로니아를 정복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2세에 의해 풀려날 때까지 약 60년 동안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였다바빌론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고대 도시로 바빌로니아 제국의 수도였다. 현재의 이라크 바빌 주 힐라에 있는 유적으로 바그다드 남쪽 80km 지점에 위치한다.

 

아케메네스 제국의 통치

이후 가나안지역은 기원전 550년부터 기원전 330년까지 220년 동안 존속하여 오리엔트 문명권 전체를 최초로 통일하고, 중동 문명의 기본틀을 제시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거대 제국이었던 이란의 고대 왕조인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기초)의 통치하에 있게 된다.

 

알렉산드로 제국(기원전 332년 - 기원전 148년) 의 통치

가나안 지역은 아케메네스제국을 멸망시킨 알렉산드 대왕의 시대를 거치면서 유대인 인구 상당수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치하의 알렉산드리아로 강제이주당하기도 하고 예루살렘 근교에 남아있던 유대인들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통치를 받다가 마카베오 반란을 일으켜 잠시 하스몬 왕조를 세우기도 한다.

 

이스라엘민족의 마지막 왕조 - 하스몬 왕조 시대 (기원전 142년부터 기원전 63년)

기원전 142년부터 기원전 63년까지 79년 동안 가나안지역/팔레스타인에 세워진 유대인의 마지막 독립왕조이며, 기원전 63년 로마 공화국에 의해 팔레스타인이 복속된 이후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될 때까지 유대인들은 2천여년간 독립국가를 갖지 못하게 된다

하스몬 왕조의 영토

 

마카베오군의 지도자 시몬은 142년에 자신을 유대의 지도자이자 총사령관 겸 대사제장으로 칭하면서 독립 왕조를 건설하게 된다. 기원전 135, 시몬은 자신의 사위인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살해되었다. 시몬의 남은 아들인 요한 히르카노스는 프톨레마이오스를 물리치고 기원전 134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 가운데 유데아의 통치자 겸 대사제가 되었다.

 

요한이 유대의 접경지역을 평정한 다음 기원전 128, 사마리아로 쳐들어가 복속했다. 이 과정에서 사마리아인들이 자체적으로 만들었던 게리짐 산의 신전을 파괴했다. 이어 요르단 강 동편의 사해 북서부 지역과 이두매 남부지역까지 평정하면서 하스몬 왕조는 시몬 때보다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하스몬왕조의 7대 왕조인 알렉산드로스 야나이는 갈릴래아와 요르단강 동편 중부등을 점령해 하스몬 왕조 최대판도를 개척했으며 이때에 이르러 하스몬 왕조의 왕들은 왕으로 칭하고 왕관을 쓰는 등 명실상부한 독립왕조임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이 후 로마공화국의 장군 폼페이우스는 하스몬왕조의 내부분열을 평정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의 각 도시들을 점령하고, 기원전 63년 예루살렘을 함락시켰고 사실상 하스몬 왕조를 붕괴시켰다. 폼페이우스는하스몬 왕조가 정복한 이두매, 사마리아, 갈릴래아, 데카폴리스 등을 모두 독립시켰으며, 유대와 예루살렘은 시리아 총독 휘하의 행정장관이 통치하도록 했다.

 

폼페이우스가 죽고 카이사르가 집권하고 안티파트로스가 유대의 통치자가 되었다. 안티파트로스는 히르카누스 2세를 대사제장으로 임명하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는 등 유대인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두 아들중 장남 파사엘은 유대와 이두매의 행정장관으로, 차남 헤로데를 갈릴래아의 행정장관으로 임명했다.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하고 로마의 정국이 혼미해진 가운데 안티파트로스도 독살당하고 팔레스타인의 권좌를 놓고 파사엘과 헤로데가 분쟁을 벌였다. 헤로데는 신속하게 로마의 돌아가는 판국을 주시해 안토니우스에게 재빨리 붙어서 권력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한편 안티고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이집트로 가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와 하스몬 왕조의 복권을 노렸다. 마침 반카이사르 파의 책동으로 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이 일어나자 그는 사두카이파들을 규합하고 파르티아의 후원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반란을 일으켜 한때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안티고노스 2세 마타티아스로 왕위에 올랐다.

 

히르카누스 2세는 다시는 대제사장-왕 직에 오르지 못하게 귀가 잘린 후 파르티아로 끌려갔고, 파사엘은 파르티아군에게 붙잡혀 죽었으나 헤로데는 겨우 마사다로 피신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안티고누스는 자신을 왕으로 새긴 동전을 발행하는 등 왕권을 행사했으나 곧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군을 격파하고 헤로데를 구해줌으로써 안티고누스의 하스몬 왕조 부활 시도는 끝장나고 만다. 결국 기원전 37, 안티고누스는 붙잡혀 처형되고 안토니우스는 헤로데를 유대의 왕으로 임명하면서 하스몬 왕조는 완전히 멸망했다.

 

이 시기 하스몬 왕조는 모압, 암몬, 에돔 등 무려 천 년 넘게 자기 나라가 있었던 민족들을 셋이나 복속했다도회지 지역의 유대인들이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하스몬 왕조의 패권정책 때문에 모압, 암몬, 에돔, 갈릴래아 인들이 반강제로 유대교로 개종되었고, 적지 않은 그리스계 이주민들도 유대교의 유일신 신앙에 매력을 느끼고 새로 유대교로 개종하는 사례가 증가했다. 유대교 사회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에 대해서 혹은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경우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여러 의견이 갈라졌다. 특히 포에니 전쟁 이후에는 페니키아인들 중에서 과거 자신들이 믿던 바알이나 타니트가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못했다는 실망감으로 유대교로 개종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이들은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커뮤니티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마지막 저항 - 마사다 항전

마사다 요새

 

66, 1차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함과 동시에 유대교의 파벌 중 하나인 열심당원이 마사다에 주둔하던 소수의 로마 수비대를 쫓아내고 마사다를 되찾았다. 유대-로마 전쟁의 전황이 로마쪽으로 기울어진 70, 예루살렘마저 함락되자 도주한 열심당원의 지도자인 엘리에젤 벤 야일(Eleazar ben Ya'ir)이 휘하 열심당원과 소수의 일반 유대인까지 대략 천여 명을 데리고 마사다로 대피하여 로마에 대한 게릴라전을 시작한다.

 

로마군은 이들을 무시했으나 이들은 무려 3년 넘게 마사다에 틀어박혀 주변 마을이나 도시를 공격했다.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실바(Lucius Flavius Silva)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로마군은 제10군단 장병 9천 명과 유대 노예, 노역인으로 이루어진 6천 명을 포함한 총 1 5천 명을 동원하여 마사다 점령에 나섰다. 로마군은 우선 마사다 주변 지역에 8개 요새를 건설하고 벽을 지어 포위망을 형성했으며 수적 우세를 앞세워 정면 공격을 감행했다.

 

마사다에 있는 저항군 인원은 1천 명도 안 되었고, 여성과 아이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던 터라 전투에 나설 수 있는 인원은 소수였다. 그러나 헤로데 대왕이 건설한 마사다 요새는 약 450m 높이의 바위 절벽에 지어진 천혜의 요새로, 5m가 넘는 높은 성벽과 20m가 넘는 37개의 망루까지 있는데다가 진입로가 오직 뱀처럼 꼬인 정면 길밖에 없는 난공불락이었다. 이런 지형 특성상 공성병기 동원도 불가능한 마사다는 철벽을 자랑했고 로마군의 마사다 공략은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 더군다나 마사다가 위치한 유대 광야는 광활한 사막으로 밤낮으로 무더위와 혹한이 공존하는 극한의 환경을 자랑해 식량, 식수 등 각종 보급에 차질이 잇따라서 부대를 유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무려 2년이 이어졌고 로마군의 실바 사령관은 고심끝에 가장 간단하지만 가장 무모한 방법을 동원했다. 마사다 요새에서 가장 성벽이 낮은 서쪽에 툭 튀어나온 바위산이 있었는데, 이곳에 토산(土山)을 쌓아 발리스타 등 공성병기를 배치하여 공격을 가하고 마사다까지 흙과 나무를 차근차근 쌓아 비탈길을 만들어 공성추를 전진시키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6개월이 흘렀고 토산과 비탈길이 완성되자, 로마군은 본격적으로 공성병기를 동원해 공격을 시작한다. 마사다에서도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성벽 뒤에 또 다른 성벽을 쌓으며 방어를 강화했으나, 지형적 우세를 상실한 이상 오래 버틸 방법은 없었다.

 

최후의 순간을 맞이한 유대인들은 모두 모였고, 로마인들의 손에 목숨을 잃지 않기 위해 극단의 선택을 감행한다. 로마군은 마사다 요새로 올라갔을 때는 폐허가 된 상태이며 남아있는 건 수백 구에 달하는 유대인들의 시체였다. 로마군은 주변을 수색하여 5명의 어린이와 2명의 노파를 발견해 자초지종을 물었다. 모든 결혼한 남자들은 자기 처자를 죽이고, 남자들 중 10명을 뽑아 이들이 나머지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남은 10명끼리 추첨을 통해 다른 이들을 죽일 최후의 한 명을 뽑고, 이 마지막 한 사람이 요새에 불을 지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으로 모두 최후를 맞이한 것이었다

 

이렇게 마사다는 한 줌의 잿더미가 돼서야 로마인들의 손에 떨어졌고, 마사다에서 살아남은 7명의 유대인들은 로마군이 살려두었다. 이후 마사다는 로마군의 주둔지가 되었다가 5~6세기에는 소수의 수도사들이 거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완전히 버려졌다. 

 

 

참고자료 : 나무위키, 위키백과 구약성서,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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