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하마스, 해즈볼라, 이란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이스라엘과 유대교,이슬람교,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사건과 변화를 겪어온 지역으로서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봄으로서 오늘날 이스라엘이 중동의 화약고 중 하나가 된 이유를 이해하는데 약간의 도움이 될것이다.
이스라엘의 기원
이스라엘의 역사는 기원전 12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한 기록은 고대 이집트의 메르넵타 석비에서 확인되었다.
* 메르넵타 석비 : 메르넵타는 이집트 신왕국 제19왕조의 4대 파라오로서 람세스2세의 후계자이며 재위기간은 기원전 1213년 ~ 기원전 1203년 이다. 메르넵타의 재위기간에 만들어진 '메르넵타의 석비'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이 처음 등장한다. 이때문에 '이스라엘 석비'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내용은 대강 메르넵타의 원정으로 "온갖 악이 횡행하던 가나안은 약탈되었다". "이스라엘은 황폐해졌고 그 씨가 말랐다" 라고 적혀있다.
이것은 국가나 도시가 아닌 '부족' 또는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의 존재에 대한 최초의 고대 이집트 기록이다.
이스라엘의 역사
이스라엘은 지리적인 특성상 고대 근동의 여러 민족과 문화가 얽혀 있는 복잡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크게 고대 이스라엘의 형성, 왕국의 분열, 바빌론 유수, 로마 제국의 지배, 그리고 현대 이스라엘의 성립으로 나눌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 형성 : 기원전 1,550 ~ 1,150년 (청동기 시대)
"가나안" 사람들은 중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2,100-1,550년)에 처음으로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다.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550-1,200년) 동안 가나안 지역 대부분은 이집트 신왕국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 존재했다. 후기 청동기 시대가 끝나면서 가나안은 혼란에 빠졌고, 이집트의 지배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 시기에 하솔, 벳스안, 므깃도, 에크론, 아쉬돗, 아스글론 등 주요 도시들이 파괴되거나 큰 피해를 입었다.
"가나안" 시나이 반도와 아나톨리아 사이에 있는 해안 지역을 가리키는 옛 지명이다. 성경에서는 일반적으로 요르단 강 서부 지역을 가리키며, 현대에는 레반트 지역에 속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과 시리아 / 레바논 남부에 걸쳐 있다.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손자이자, 함의 아들 이름인 가나안에서 유래하였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1,200년경의 고대 이집트 비문인 메르넵타 석비에서 처음 언급된다. 이스라엘인의 조상은 이 지역에 뿌리를 둔 고대 셈어를 사용하는 민족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성서 히브리어로 알려진 고대 히브리어를 사용했으며, 기원전 14세기(기원전 1,400-1,300년)의 기록인 아마르나 문서/서신(Amarna Letters)에서는 가나안에서 반란, 전쟁 등을 일으키는 하비루(히브리; Habiru)/아피루(Apiru)를 기록하는데, 출애굽에 회의적인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가나안 내부에서 난을 일으키던 이 하비루/아피루들이 외곽 지역인 고원 지대로 도피해 이곳에서 초기 이스라엘을 형성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으며, 이 하비루가 이스라엘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스라엘이 메르넵타 비문에 등장한 시기인 기원전 1,200년경과 비슷한 시기부터 블레셋 사람들은 남쪽 해안 평야에 정착했다.
블레셋(히브리어: פְּלֶשֶׁת)은 주로 가자, 아슈켈론, 아슈도드, 에그론, 가드, 야파로 구성된 남서부 레반트의 5개 주요 도시 또는 펜타폴리스의 연합이었다. 학자들은 블레셋인들이 기원전 1200년경부터 이 지역에 정착하여 지역 가나안 사람들과 섞이며 펠레셋인 또는 블레셋인들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믿는다.
실제 해얀 평야 지대를 가보면 이곳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의 사막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넓고 푸른 곡창지대를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여행객 (99%는 성지순례자)들은 교회에서 추천하는 성지만 들러 보는데 개인적으로 해안가의 평원지대 방문을 적극적으로 추천하며 실로 이곳이 젓과 꿀이 흐르는 땅임을 실감하게 된다.
기원전 1,150-950년 (철기 시대)
아마도 철기 시대에 이르러서야 가나안 사람들은 자신들을 '이스라엘인'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아지며. 이들은 혼인 금지, 가계와 계보, 종교 등을 통해 주변 이웃들과 차별화했을 것이다. (고고학자 폴라 맥너트(Paula McNutt)의 주장)
철기 시대 초기 이스라엘 지역에 블레셋과 가나안 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문화가 갑작스럽게 등장했음을 보여주었다. 이 새로운 문화는 블레셋 식단의 약 20%가 돼지고기였던 것과 달리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며, 고도로 장식된 도자기를 사용하는 블레셋/가나안 관습을 버리고, 할례를 시행하는 특징을 가진다. (핀켈슈타인과 실버만의 연구)
일련의 발굴조사에서 고지대의 빽빽한 마을 네트워크 유적의 발견은 기원전 1,200년경 가나안 중앙 산악 지대에서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보여주었다. 폭력적인 침략의 흔적이나 명확한 민족 집단의 침투는 없었으며, 오히려 생활 방식의 혁명으로 보인다. 인구가 드문드문했던 남쪽 유다 산에서 북쪽 사마리아 산에 이르기까지, 쇠퇴해 가던 가나안 성읍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고지대에 약 250개의 산꼭대기 마을이 갑자기 나타났다. 여기에 최초의 이스라엘인들이 존재했다.
이처럼 현대 학자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고지대의 기존 주민들로부터 평화롭게 내부적으로 발생했다고 본다.
초기 철기 시대 동안 이스라엘인들은 주로 인구 300~400명 이하의 작은 마을에 거주했으며, 마을은 언덕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
내가 처음 이스라엘에 갔을때 신기한 것은 마을이 산꼭대기에 많이 있어서 현지인에게 그 사유를 물어보니 이스라엘은 더운지방이라 높이 올라 갈 수록 시원한 바람이 많이 불기 떄문에 산 꼭대기 집을 선호하고 위로 올라갈 수록 집 값이 비싸다고 했다.
판관기 등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왕정이 등장하기 전 초기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판관들이 지도했다고 나온다. 기록과 문자 사용은 작은 지역에서도 확산되어 기록이 가능해졌다.
기원전 950–0년 (후기 철기 시대)
BC 10세기에 기브온-기브아 고원을 기반으로 급작스럽게 대규모 정치 세력이 형성되고 성서의 시삭인 셰숑크 1세에 의해 파괴된 후 작은 도시 국가들로 분열되어 회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기원전 950년에서 900년 사이에 또 다른 대규모 정치가 북부 고지대에서 나타나 결국 이스라엘 왕국의 전신으로 간주될 수 있는 디르사를 수도로 삼았다. 이스라엘 왕국은 중요한 지역 강국으로 통합되었고, 유다 왕국은 기원전 9세기 후반에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의 초기 존재와 그 범위와 권세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이스라엘 연합 왕국이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북쪽 이스라엘 왕국이 기원전 900년에, 그리고 유다 왕국은 기원전 850년에는 존재했을 것으로 본다.
이스라엘 왕국은 사울, 다윗, 솔로몬 왕에 의해 통일되었으나, 솔로몬의 죽음 이후 왕국은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두 왕국 중 더 번영했고 곧 지역 강국으로 발전했다. 오므리 왕조 시대 이스라엘은 사마리아 , 갈릴리, 요단 계곡 상류, 샤론 및 트랜스요르단의 대부분을 통치했다. 사마리아는 레반트에서 가장 큰 철기 시대 구조물 중 하나의 본거지였다.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은 여러 왕들이 교체되며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었고, 남쪽의 유다 왕국은 다윗의 후손들이 통치하며 상대적으로 안정된 시기를 보냈다.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멸망당하며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빌론으로 포로로 끌려갔다. 바빌론 유수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또 다른 중요한 사건이다. 기원전 586년, 바빌론 제국은 유다 왕국을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파괴했다. 이 사건은 유대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많은 유대인들이 바빌론으로 포로로 끌려갔다. 이 시기에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앙과 문화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이로 인해 유대교의 기초가 더욱 확고해졌다. 바빌론 유수는 유대인들에게 신앙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고, 그들은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예루살렘을 재건하게 되었다.
남쪽의 유다 왕국은 기원전 586년에 신바빌로니아에 멸망당했다. 신바빌로니아 기원전 539년에 페르시아 제국에 멸망하며,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2세에 의해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했다.
그 후 이 지역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 중에 정복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후, 마케도니아는 분열하여, 팔레스타인과 유대 지역을 셀레우코스 제국(시리아 왕국)와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이집트)이 각각 다른 시기에 지배하게 되며, 마카베오 전쟁을 거쳐 유대인의 왕국 하스몬 왕조가 세워졌다.
기원전 1세기경 하스몬 왕조는 로마 제국의 보호국이 되며, 그 후 로마 제국의 속주인 유대 속주가 된다. 기원전 63년, 로마는 이스라엘 지역을 정복하고, 이후 유대 지역을 속주로 삼았다. 이 시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낫다.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유대인들은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고, 그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은 기원후 66년부터 73년까지의 유대 전쟁이다. 이 전쟁은 로마 제국에 의해 진압되었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다. 132년 바르 코크바의 난(제3차 유다 전쟁)이 일어나, 135년 다시 로마 제국에 진압되어, 시리아의 속주가 되었다. 이후 유다인들은 중동 전역으로 흩어지며, 이때부터 난민들이 세운 디아스포라가 다수 발생하게 된다.
다음에는 기원 후 로마통치부터 중세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하여 알아 보자.
참고 자료 : 나무위키, 위키백과, 네이버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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