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땅, 다른말로 가나안, 팔레스타인지역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오늘까지 전쟁이 멈추지 않는 곳이다.
나는 지난 수년동안 업무상 이스라엘을 십여차례 방문 하면서 예루살렘, 마사다 요새, 사해, 요단강, 갈릴리 호수, 여러 성지, 하늘없는 감옥인 서안지구의 장벽, 사막에서 양치기하는 베두인, 산업단지 , 방산 공장, 키부츠 등을 둘러 보면서 늘 의문인 것이, 왜 이 지역은 예나 지금이나 전쟁이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곳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이스라엘에 대하여 전문적으로 공부한 전문가의 시각이 아닌 이스라엘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을 좀더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한다.
이스라엘 왕국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의 통일 왕국인 이스라엘 왕국 또는 헤브라이 왕국은 고대 이스라엘에 존재하던 히브리인들의 왕국으로, 기원전 1047년경에서 기원전 930년경 사이에 존재했던 것으로 본다. 나중에 북이스라엘 왕국과 남유다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북이스라엘 왕국과 구분하기 위해 이 시대를 통일왕국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다윗 왕 시대(기원전 1010년 ~ 기원전 970년)에 이르러 이스라엘은 이집트 변경에서 유프라테스 강 유역까지 다스리는 강대국이 되었고, 뒤를 이은 솔로몬 왕은 왕국을 평화롭게 유지하기 위해 성전을 건축하여,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종교 중심지로 삼았다. 그러나 솔로몬 왕이 죽은 뒤 이스라엘은 왕위 다툼으로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뉘게 된다 .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멸망당하고, 남쪽의 유다 왕국은 기원전 586년에 신바빌로니아에 멸망당한 이후에 바빌로니아 왕국은 남유다의 백성을 본국으로 끌고 가 노예로 삼았는데, 이때부터 히브리족을 유다 사람들이라는 뜻의 유대인이라 부르게 된다. 유대인은 기원전 538년에 바빌로니아 왕국을 정복한 페르시아의 칙령에 따라 이스라엘 지역으로 돌아온다. 이후 이스라엘 지역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알렉산더 제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기원전 129년에는 유대 국가인 하스몬 (하스모니아) 왕조가 세워져 솔로몬 시대에 버금가는 번영을 누리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조 - 하스몬 왕조
기원전 142년부터 기원전 63년까지 79년 동안 팔레스타인 지역에 세워진 유대인의 마지막 독립왕조이다. 하슈모나이 왕국(히브리어: חַשְׁמוֹנַּאִים, Ḥashmona'im) 또는 하스모니안 왕국(라틴어: Hasmonean)은 고대 유다 지방과 주변 지역의 지배 국가였다. 기원전 140년과 기원전 116년 사이에 셀레우코스 제국은 유대인들을 반식민지 상태로 통치했다. 기원전 110년부터 셀레우코스 제국이 해체되면서 왕조는 완전히 독립하여 사마리아, 갈릴레아, 이투레아, 페레아, 이두메아 등의 인접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모압, 암몬, 에돔 등 무려 천 년 넘게 자기 나라가 있었던 민족들을 셋이나 복속했다. 그리고 모두 유대교로 강제 개종시켜, 한두 세대 만에 그 정체성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이 시기를 이스라엘 독립 왕조 시기라고 부른다.
하슈모나이 왕국은 유다 마카베오(יהודה田המכבי, 예후다 하마카비)가 마카비 전쟁 때 셀레우코스 군을 격파한 지 20년 만에 동생인 시몬 마카베오의 주도로 성립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영토 가운데 헬레니즘의 계승국 가운데 하나인 셀레우코스 제국을 다스린 안티오코스 4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공격이 있은 후 시리아와 페니키아 지방의 대한 엄격한 통치를 실시 하였다. 예루살렘과 그 사원을 파괴하고,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종교 및 문화적 관습을 탄압하고, 헬레니즘 관행을 강제했다. 뒤이어 일어난 유대인들의 반란(167 BCE)은 로마 공화국과 파르티아 제국 등 신흥 강대국들의 공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붕괴로, 힘을 얻은 유대인들은 독립국가 시기를 시작했다.
시몬의 증손인 히르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대왕의 대리전에서 볼모가 되었다. 폼페이우스(48BCE)와 카이사르(44BCE)의 죽음과 관련 로마 내전으로 말미암아 로마가 하슈모나이 왕국에 대한 지배가 일시적으로 완화되어 파르티아 제국이 뒷받침하는 자치권을 잠시 재확인할 수 있었다. 이 짧은 독립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휘하의 로마군들에 의해 급속히 무너졌다.
왕국은 기원전 37년에 헤로데 왕국에 항복하기 전까지 103년 동안 생존해 있었다. 기원전 37년 헤롯 대왕(이두메안)을 왕으로 설치함으로써 유다는 로마의 분봉왕령이 되었고 하슈모나이 왕국은 멸망하였다.
기원전 63년 로마 공화국에 의해 팔레스타인이 복속된 이후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될 때까지 유대인들은 2천여년간 독립국가를 갖지 못하게 된다.
로마제국에 의한 유다속주
유다이아 속주(유다이아) 또는 유대 속주라고 하며 로마제국에 의해 이스라엘에 위치하던 속주이다. 헤로데 사두정치가 종료된 후 유다, 사마리아, 에돔 지역을 통합하여 세워졌다. 헤로데 아르켈라오스의 왕국에서 따온 이름이었으나, 속주는 훨씬 더 넓은 영토를 아우르고 있었다. 유다이아라는 이름은 기원전 6세기 유다 왕국에서 유래되었다.
이스라엘지역은 기원전 1세기경 하스몬 왕조는 로마 제국의 보호국이 되며, 기원전 63년 이스라엘 땅은 로마 제국의 한 주로 편입되었다. 로마에 의해 이스라엘의 왕으로 임명된 헤롯 1세는 성전을 다시 짓고 마사다 요새를 세우기도 했지만, 대중의 신임은 얻지 못했다. 이 시대에 베들레헴에서는 예수가 탄생하였고, 그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기독교가 발생하였다.
헤롯 1세가 죽은 뒤 이스라엘 땅을 직접 통치한 로마가 유대인의 관습과 종교를 인정하지 않자, 이에 유대인들은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킨다. 기원후 66년 제1차 유다 전쟁이 발발하나, 70년 로마 제국에 의해 진압되고 132년 바르 코크바의 난(제3차 유다 전쟁)이 일어나고, 135년 다시 로마 제국에 진압되어, 시리아의 속주가 되었다. 이후 유다인들은 중동 전역으로 흩어지며, 난민들이 세운 디아스포라가 다수 발생하게 된다. 바르 코크바 반란(132~135년) 이후,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이 이스라엘 땅의 이름을 유대인이 싫어하는 팔레스타나족의 이름을 딴 시리아 팔레스티나로, 예루살렘의 도시 이름을 아일리아 카피티나로 변경했다.
유다 속주 기간 동안 로마인 검열관은 사형으로 처벌할 권한을 부여받았고, 세금도 로마에 의해 과세되기 시작했다. 유대이아 속주는 퀴리니우스 인구조사(Census of Quirinius), 예수의 십자가 30-33CE(Crucifixion of Jesus) 기간 동안 건국 당시 소요의 현장이었으며, 유대-로마 전쟁으로 알려진 몇 번의 전쟁이 존재 기간 동안 벌어졌다. 제2차 예루살렘 신전은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끝날 무렵인 70년에 로마인들에 의해 파괴되었고, 피쿠스 유다이쿠스가 설치되었다.
유대-로마 전쟁과 최후 항전 - 마사다 요새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스라엘(유대인)인 들이 로마군에 처절히 저항한 마사다요새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마사다(히브리어 מצדה, , 요새라는 뜻)는 이스라엘 남부, 유대 사막 동쪽에 우뚝솟은 거대한 바위 절벽에 자리잡은 고대의 왕궁이자 요새를 말한다. 사해 서쪽해안에 위치한 천혜의 절벽요새이다. 높이 400m, 정상은 길이 600m, 폭 250m의 평지를 이루고 있다. 마사다는 헤롯왕의 요새인 동시에 유대인들이 로마에 항거했던 유대 전쟁 최후의 비극적 격전지로 유명하다. 1963 ∼1965년 고고학자 이갈 야딘 교수의 발굴작업으로 그 실체가 알려지게 되었다.
마사다는 기원전 37년부터 31년 사이에 로마제국의 괴뢰정권인 헤로데 왕이 악정으로 인해 자기에 대항한 반란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피난 요새이자 왕궁으로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요새로 지어진 것은 하스모니안 왕가의 얀나이우스가 먼저이며 이후 헤롯 왕의 뛰어난 건축술로 다시 증축한 것이다. 수천 명이 몇 년간 충분히 먹을 수 있을 정도 분량의 식량을 쌓을 수 있는 식량창고와 물 저장고도 만들었다.
서기 70년 로마제국의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해오자, 유대인 지도자 엘리아젤 벤 야이르가 이끄는 유대인 열심당원(Zealot 또는 Kanai)들 약 960명이 마사다 요새로 피신하여 로마에 대한 저항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자 로마군단은 마사다의 험난한 지형 때문에 쉽게 정벌하지 못하고 장장 3년 동안이나 공격을 계속해 오던 끝에 엄청난 토담을 쌓아 마사다 요새에 접근한다. 이로써 마사다의 수비벽이 무너졌다.
로마군단의 진격이 확실시되자 지도자 벤야이르는 로마군에 잡혀서 온갖 수모를 겪느니 차리리 자유인으로서 영광되게 죽기를 결심한다. 각 가족의 가장들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직접 칼로 찔러 죽인 다음 모든 남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열 명을 추첨하고 그들이 나머지 사람들을 죽이고 다시 한 명을 뽑아 아홉 명을 죽인 후 그도 최후로 자결하였는데, 요새푸스의 유대전쟁사에 의하면 노파 1명, 어린이 5명, 엘리아젤 벤 야이르의 친척 노인 1명 등 모두 7명이 생존하여 이 이야기가 전해졌다고 한다. 로마군은 이들을 풀어 주었다.
3년 동안 한맺힌 포위작전에 대한 영광의 대가를 바랐던 로마군은 960구의 시체 앞에서 망연자실했으며 그 비극적인 전설같은 사실이 오늘날까지 전승화되고 있어 이스라엘인들의 불멸의 성지가 되었다. 마사다는 현재 이스라엘 장병들의 선서식장과 유대인들의 성인식장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현재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중에 하나이며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와서 이스라엘을 자유롭게 여행 할 기회가 오면 반드시 마사다 요새를 방문해 보길 강력히 추천한다.
참고 : 위키백과, 네어버 지식백과,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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