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 간에 4차례 중동전쟁이 일어났고 2023년 10월 7일에 시작된 이스라엘-하마스 간의 전쟁으로 이들 간의 갈등은 막장을 치닫고 있다. 과거에 일어난 4차례의 중동전쟁을 이해 함으로써 최근 이스라엘과 이란 등 중동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이해하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이스라엘과 중동전쟁의 원인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4일, 다비드 벤구리온의 건국선언으로 건국이 되었으며 밴구리온은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 이스라엘의 건국은 유대인들에게는 오랜 기다림의 결실이었지만, 아랍 국가들 특히 팔레스타인지역 거주 아랍인들에겐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없는 침공으로 여겼고, 이는 중동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잦은 충돌은 끊이지 않았고 총 4차례에 걸칠 중동전쟁이 이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충돌, 이스라엘-하마스 충돌, 이스라엘-헤즈볼로 충돌, 이스라엘-이란 충돌 등 이스라엘과 아랍국가간의 충돌은 계속되고 있다.
1차 중동전쟁 (1948-1949)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뒤 영국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1920년 4월 25 - 1948년 5월18일) 에서 손을 떼게 된다. 무주공산이 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지역을 둘러싸고 아랍인과 유대인 간의 충돌이 지속되었고, UN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분할안도 아랍인과 유대인 양측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좌초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번지게 된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의 결정 이후 이스라엘은 신생 독립 국가로 탄생하였으나, 아랍은 이러한 결정에 동의하지 않고 이스라엘 국가 건설에 반대하였다.
1차 중동전쟁은 1948년 5월 18일 이스라엘 건국선언 이후 아랍 국가들의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며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 군은 초기의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고, 많은 전투에서 승리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전투가 끝난 후, 이스라엘은 국제 사회에서 독립 국가로 인정받게 되었고, 팔레스타인인들은 대규모 난민이 되는 비극을 겪게 된다.
아랍은 전쟁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유엔의 결정을 위반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최근 일부 국가들의 입장 변화를 제외하고는 한결같이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아 왔다.
1947년 이전 팔레스타인 영토(초록색)는 UN의 ‘팔레스타인 분할안’ 이후 절반으로 감소. 이후 4차례의 중동 전쟁 이후 현재는 대부분 이스라엘(흰색)의 영토가 됐다.
2차 중동전쟁 (1956)
1950년 4월, 벤 구리온 수상은 요르단 국왕 압둘라와 평화 협정을 위한 비밀 접촉을 가졌다. 많은 아랍국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협상의 가능성을 찾아 나갔으나, 그 해 7월 20일에 압둘라 왕은 예루살렘 올리브 산에서 아랍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함으로써 이 일은 무산되고 말았다.
1951년 봄에는 시리아와의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하면서, 시리아는 접경 지대에 산발적인 공격을 해 왔으나 이스라엘은 이를 격퇴하였다. 1956년 7월 26일,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아스완 댐 건설로 인한 재정 확보를 명목으로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고, 운하를 봉쇄하여 이스라엘 선박의 통행을 통제하는 한편, 이스라엘 상선을 강제로 나포하기도 하였다. 계속되는 이집트와의 산발적인 충돌은 1956년 10월 29일, 시나이 캠페인으로 번져 제2차 중동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100시간 만에 공수 부대와 탱크를 앞세우고 시나이 반도 전체를 점령하였으며, 수에즈 운하에 이르렀다. 또 많은 무기와 6,000명의 이집트 포로를 잡았다. 당시의 국방상은 벤 구리온이었고 참모 총장은 샤론이었다. 11월 3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즉각적인 정전을 요구하는 미국의 제안을 가결하여, 영국 및 프랑스 연합군을 파견하여 이집트를 공격하여 11월 7일 휴전을 성립시켰다. 소련과 미국은 이스라엘에게 점령지 반환을 위하여 압력을 가했으며, 기름 공급 협정을 취소하였다. 이스라엘은 1957년 11월 7일,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와 협정하여 시나이 반도를 포함한 가자 지구를 이집트에 되돌려주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국경의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그 영향은 이스라엘에게 매우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이스라엘은 제국주의적 식민 정책주의 국가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으며, 이집트의 대통령 나세르는 아랍 국가들로부터 정치적인 승리로 인한 영웅적 지지를 얻어 냈다. 물론 이스라엘은 군사적 우위를 통한 안보의 가능성을 확인하였으며 열강들과의 외교적 관계가 밀접해졌다는 이익을 얻었으나, 아랍국가 역시 이를 계기로 시리아가 주축이 된 아랍 연맹을 탄생시켰다.
3차 중동전쟁 (1967) - 6일 전쟁
이집트와 시리아, 요르단은 제1차 중동전쟁의 패배와 손실을 만회하고자 했고, 이집트의 압둘 나세르가 먼저 움직였다. 시리아, 요르단과 군사동맹을 체결한 이집트는 1967년 5월 시나이반도에 군대를 집결시켰고 시나이반도에 주둔 중인 UN군의 전면 철수를 요구했다. 이집트는 또한 홍해에 접한 이스라엘의 유일한 항구인 에일랏(Eylat)으로 향하는 티란 해협을 봉쇄했다.
이집트의 위협이 커지자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군은 선제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이스라엘 공군은 하루 만에 이집트 공군력 90%를 파괴했고, 이어 시리아와 요르단에도 공습을 가해 두 국가의 공군력을 무력화시켰다. 이스라엘군은 시나이반도로 군대를 파견해 공군의 보호를 받지 못해 무력한 이집트 육군을 패배시키고 시나이반도를 점령했다. 이스라엘군은 요르단과 시리아 방면으로 진격해 6월 10일에는 동예루살렘과 서안지구, 시리아의 전략적 요충지인 골란고원까지 모두 차지하며 6일 만에 전쟁을 승리로 종결지었다. 이스라엘군이 아랍 연합군을 6일 만에 패배시켰기에 제3차 중동전쟁은 '6일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1967년 11월 22일 UN안전보장이사회는 아랍-이스라엘 분쟁 종식을 위한 토대로 결의안 242호를 통과시켰다. 지역 내 모든 국가에 상대국의 주권과 영토, 국경을 존중할 것을 촉구했으며 이스라엘에는 점령지에서의 철수를 요구한 결의안 242호는 이후 아랍-이스라엘 분쟁 해결의 토대인 영토와 평화의 교환이라는 원칙의 토대가 되었다. 결의안을 수용한 이스라엘과 이집트, 요르단 사이의 영토 반환을 위한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지며 성과를 내지 못했고, 시리아는 결의안 수용을 거부했다.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난 이후에도 수에즈 운하를 사이에 둔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소규모 교전은 계속되었다.
1967년의 6일 전쟁은 중동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고, 이스라엘은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와의 전투에서 단기간에 승리하며, 이는 이스라엘의 영토 확장을 가져왔으며, 중동 평화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4차 중동전쟁 (1973) - 욤키푸르 전쟁
1967년 6월 제3차 중동전쟁에서 단 6일만에 대승을 거둔 이스라엘은 각각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을 잃어버린 이집트와 시리아에게 이스라엘의 인정과 항구적인 평화 협정 체결, 이 지역의 비무장지대화를 조건으로 두 지역을 반환하는 것을 비밀리에 제안했으나 이집트와 시리아, 요르단 등 아랍 8개 국가들은 같은 해 9월 수단의 하르툼에서 열린 정상회의에서 무평화, 무인정, 무협상의 3무 원칙을 공식화하며 단박에 거부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이 지역을 본격적으로 자국 영토로 합병하는 절차에 착수했고 이에 반발한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의 반환과 이 지역에서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소련의 지원을 받아 이스라엘과 무력 충돌을 벌였다. 이에 양국이 대치하는 수에즈 운하 일대에서 이스라엘군과 이집트군 사이에 수년 동안 국지전이 계속되었는데 이를 소모전이라고 한다.
전쟁 아닌 전쟁으로 3년 넘게 이어져 온 이 소모전은 1970년 8월 휴전 협상이 타결되면서 끝을 맺었으나 양쪽의 대치는 수에즈 운하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동안 이집트는 주요 밥줄인 수에즈 운하가 폐쇄되면서 경제적 손해가 막심했고 이스라엘 역시 소모전으로 인한 지속적인 출혈에 점점 부담이 가해지고 있었다.
압둘 나세르의 뒤를 이어 1970년 집권한 안와르 사다트(Anwar Sadat) 이집트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점령이 장기화되기 전에 시나이반도를 되찾고자 했다. 1973년 10월 6일 유대교 명절인 욤 키푸르(Yom Kippur, 속죄일)를 기해 이집트군은 시나이반도를 기습 공격했고, 시리아도 골란고원을 공격하며 '욤키푸르 전쟁' 또는 '제4차 중동전쟁'으로 알려진 전쟁이 발발했다.
이 두나라의 기습 공격으로 이스라엘군은 전쟁 초기 큰 피해를 입었으나, 미국의 군수 지원으로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아랍 산유국은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원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제3차 중동전쟁에서 점령한 영토에서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감산하고 이스라엘을 지원한 국가에 원유 수출을 중단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아랍 산유국들의 발표 이후 유가는 4배 이상 뛰었다(석유파동 발생).
전쟁이 진행되며 전세는 아랍 군대에게 불리하게 흘러갔고 이스라엘군은 반격에 나서 이집트와 시리아 영토 내로 진격했다. 그러나 국제 유가 폭등에 따른 경제적 압박, 소련의 전쟁 개입 가능성으로 미국은 정전을 위한 외교적 노력에 나섰고, UN안전보장이사회는 결의안 242호를 지지하는 결의안 338호를 통과시켰다. 미국의 중재 아래 1974년 이스라엘은 이집트, 시리아와 정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에 통제권을 확보했고 시리아도 골란고원 일부를 탈환했다.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에서는 이스라엘군이 일부 철수했고 UN군이 주둔하는 완충 지대가 지정되었다.
골란고원은 만년설이 있고 중동에서는 드물게 이스라엘에 의해 스키장이 운영되는 곳이다.
골란고원(Golan Heights)은 이스라엘·시리아·요르단·레바논 4개국 국경이 맞닿은 전략 요충지다. 갈릴리호수 북쪽의 이 고원은 남북 70㎞, 동서 40㎞ 길이와 폭을 가졌다. 넓이는 제주도와 비슷하다. 고원 북쪽에는 해발 2814m의 만년설이 덮인 헤르몬산(Mt. Hermon)이 있다. 이스라엘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때 시리아 영토인 골란고원을 점령했다. 시리아는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이 지역을 탈환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양국은 1974년 접경지역 일부를 비무장지대로 설정했고, 현재는 1000여 명의 국제연합(UN)군이 주둔하고 있다.
이스라엘-아랍/팔레스타인 갈등의 현재
이스라엘이 1948년 5월 18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지역에서 독립국가건설을 선언한 이후 현재까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아랍 사이의 갈등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은 끊임없이 테러와 충돌이 반복되고 있으며, 최근 이스라엘 -하마스/헤즈볼러/이란과의 충돌은 이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마무리
이스라엘 건국 이후 현재까지 수만은 무장충돌과 수차례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이들 간의 갈등은 크지기만 하고 있다. 현재는 이란이 지원하는 헤즈볼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시리아와 주변의 아랍국가들, 이란, 간접 지원국인 러시아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 간의 대립양상으로 보이나 트럼프 정부가 시작되면 어떻게 될지 지켜보자.
이스라엘과 고대도시인 시라이의 다마스쿠스 등을 자유롭고 평화롭게 여행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참고자료.
Wikipedia, 나무위키, 매일 경제,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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